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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공주와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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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공주. 평원왕의 딸이자 영양왕, 영류왕, 고대양의 누이'평강공주'에서 '평강'은 이름 혹은 봉호가 아니다. 단지 평원왕(평강상호왕)의 딸이라 하여 평강공주라 불린 것이다. 그 유명한 온달 설화의 주인공으로, 평양성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던 온달과 결혼, 고구려의 이름 높은 장수로 만들었던 일화로 유명하다.



평강공주는 어릴 때부터 자주 울었는데, 아버지인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울 때마다 "넌 너무 울어서 탈이니 귀한 사람의 아내는 못되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한테 시집 보내야겠는걸?"하며 놀리곤 했다고 한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공주를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예전에 평원왕에게 들었던 농담을 들먹이며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왕은 기가 막혀서 공주를 말렸지만 오히려 공주는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라며 되려 왕을 나무랐다.


공주가 고집을 꺾지 않자 화가 난 평원왕은 공주를 궁 밖으로 내쫓았는데, 이때 공주는 금팔찌 등의 패물을 잔뜩 가지고 나와 온달에게 시집가게 된다. 평강공주는 궁에서 나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서 가난에 시달리던 온달의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온달에게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 일자무식했던 가난뱅이 온달을 훌륭한 장수로 성장시킨다.


한편 평강공주는 비루먹은 말을 한 마리 사와서는 잘 보살펴 훌륭한 말로 키웠다. 온달은 이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나가 많은 산짐승을 잡아 우승을 하였다.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시집 갔다던 온달이 엄청나게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후 온달은 중국 후주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에 이산(肄山)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대형(大兄) 벼슬을 받았으며, 비로소 평원왕으로부터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서(以西) 땅을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중에 아단성(阿旦城)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영양왕과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평강공주가 와서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은 이미 정해졌으니 ,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평강공주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평강공주의 정치적 위치로 인해 말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평강공주는 바로 영류왕과 남매이기 때문에, 642년 당시 생존했다면 연개소문 일당의 쿠데타 시 변을 당했을 거라는 설도 제기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학계에서는 평양직할시 역포구역에 있는 동명왕릉 둘레 진파리무덤떼(고분군) 제4호무덤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으로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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